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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의 미학

김희경박사 2025. 4. 2. 09:33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공자(孔子, BC551~479)는 말했다. 예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다. 공자는 사람들이 예의 형식을 지킬 때 도덕적 가치도 지켜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형식을 잃으면 사회가 무너지고 인간관계도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칸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말했다. 그는 도덕이 특정한 감정이나 상황에 의존해서는 안되며,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인 보편적 형식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형식적 도덕법칙이 없으면 윤리는 개인의 감정이나 이익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형식적 원칙이 내용을 지배해야 도덕적 일관성이 유지된다. 형식논리학과 동물학의 업적을 남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는 형상(Form)과 질료(Matter)의 개념으로 형식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내용이 있어도 형상이 없으면 그것은 온전한 실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질료인 대리석이 있어도 조각상의 형상이 없으면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이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을 결정하는 요소임을 보여준다.

  껍데기는 단순한 겉모습이 아니다.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당할 요소가 더욱 아니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담는 그릇이다. 껍데기는 본질을 결정한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껍데기를 피상적이고, 허울뿐이며, 본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껍데기 없는 내용은 없다. 달걀의 껍질이 없다면 노른자와 흰자는 존재할 수 없다.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견딜 수 있는 것도 껍질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은 대논리학에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고 했다. 몸에 잘 맞는 클래식 수트를 입으면 자세가 달라진다. 어깨가 펴지고, 발걸음도 곧고, 힘차게 바뀐다. 형식이 주는 힘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미지와 표면적 형식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예술작품 등 특정 대상이 지닌 이미지가 갖는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아우라(Aura)의 미학으로 설명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본래의 원형이 사라지고 모방물이 실제보다 더 진짜처럼 인식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개념을 통해 복제물이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시대를 설명했다. 이미지가 없으면 알갱이가 비어버린 가재의 컵데기가 된다. 이처럼 껍데기는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껍데기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기호학의 관점에서 패션과 광고 속 이미지가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분석했다. 우리가 입는 옷, 쓰는 말, 사용하는 물건이나 도구들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를 갖는다. 건축물의 외형적 디자인이 공간의 기능을 결정하고, 패션에서 겉모습이 정체성을 형성하며, 브랜드 로고나 광고 카피 하나가 소비지의 인식을 좌우한다. 껍데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본질적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알맹이는 껍데기로 이미지를 보일 때 아우라의 신비로움을 갖는다. 학위논문을  쓸 때 규정된 학교의 논문 형식에 맞지 않으면 등록을 할 수 없다. 내용은 형식에 의해 권위를 갖는다. 본질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의 분별은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이나 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우선한다. 옳은 일이라고 해도 법적인 절차나 형식(Form)을 갖추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게 된다. 더구나 본질을 담은 그릇을 깨거나 틀을 부수면 공정성을 잃는다. “자본주의는 종교의 도덕관념에 근거한 근검절약으로 형성되었다”라고 강조한 관료제와 형식적 합리성을 주창한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는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정해진 형식과 절차에 따라 조직이 운영될 때 사회가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형식적 절차가 명확해야 공정성과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 무시하면 권위주의나 포플리즘 정치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