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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Apology)의 미학

김희경박사 2024. 8. 30. 04:03

“사과는 사랑스런 향기다. 사과는 아주 어색한 순간을 우아한 선물로 바꾼다”미국의 소설가, 교사였던 마가렛 리 런벡(Margaret Lee Runbeck.1905-1956)의 말이다. 며칠전 아파트주차장에서 후진을 하다가 통로에 세워둔 차와 접촉사고를 냈다. 다행히 범퍼에 긁힌 자국이 남았다. 자동차 소유주에게 바로 전화로 연락을 하고 기다렸다. 젊은 청년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주말이라 보험회사에 사고접수가 안되어 다음날 조치를 취했다. 보험담당자로부터 수리 등에 대한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차주에게 내용을 문자로 보내고 거듭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자동차 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중에 중고차로 매각할 때 사고 이력 때문에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없으니 그만큼 보상을 받고 싶다고 했다. 지저분하게 변명하느니 깨끗하게 사과하고 수리를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은 빈자리가 넉넉해서 주차라인 이외의  통로에 주차를 금지해 왔다. 따지고 들면 쌍방과실일 수도 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사례를 확인차 관리소에 들렀다. 그 차는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주인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관리소장은 대인, 대물에 대한 보험이 되어 있으니 보험회사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을 보내라고 했다.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예전 같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용서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사과를 하는 순간 모든 발못은 100%로 사과한 사람의 과실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좀체로 사과하지 않는다. 우선 자기 잘못은 뒤로 하고 상대의 약점이나 과실을 찾아내고 너 때문이라고 큰 소리친다.

  성경에서 예수는 사과와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잘못하였다고 하거든 용서하라.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네게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매번 뉘우치고는 네게 와서 용서를 빌거든 그를 용서하여 주라”.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잘못 투성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잘못을 사과하면 받아들이는 여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호주는 국가화해주간(National Reconciliation Week: NRW)이 있다. 매년 5월 27일부터 6월 3일까지 매년 주제를 정해서 행사를 진행한다. 특별히 하루 전 5월 26일을 “사과의 날(Sorry Day)” 행사를 전국적으로 펼친다고 한다.“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s)’인 원주민 어린이와 원주민에게 저질렀던 인종 차별에 대한 사과이다. 사과의 날과 화해주간은 모든 호주인들이 역사, 문화 및 업적에 대해 배우고, 화해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사실 어떤 국가이든지 갈등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서로를 고집하면 화해는 성사되지 않는다. 기억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복수를 만들고 갈등을 빚는 기억이라면 잊는 것이 좋다. 사과와 용서를 묶으면 화해가 된다. 사과와 용서없는 화해는 없다. 듣기좋은 말로 무조건 용서한다고 하지만 내심에는 사과를 받고 싶은 기대가 있기 마련이다.

  누구의 말인지 모르지만 훌륭한 사과의 과정은 “미안해, 내 잘못이야, 바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한다. 사과는 진정성이 생명이다. 진정성은 이 세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 사과를 하면서 당위성을 주장하면 순간을 회피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사과와 용서는 마음을 주고 받는 행위이다. 서로가 잊을만큼 마음이 편해질 때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 있다. 마음 구석에 여전히 풀리지 않고 녹아지지 않는 앙금과 응어리가 있다면 화해는 멀리 있다. 잘못을 한 사람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솔한 사과를 해야 한다. 사과를 받는 사람도 진솔한 사과에 용서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과하기를 주저하는 심리는 아마도 자존감과 두려움이 아닐까?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자존감을 구긴다. 심지어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정치인들을 보아왔다. 당당히 사과하는 쪽이 죽는 것보다 낫다. 상대에게 평생 무거운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금년 광복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면되고 복권되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사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면복권은 이를 전제로 했다고 믿는다. 그 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유력한 정치인, 기업인에 대해서는 사회적 통합과 경제라는 사면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억울하고 직무상 불가피하게 법을 어긴 경우도 있다. 의도적 법죄가 아닌 과실로 인해 갇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는 필요하다. 용서를 받은 사람도, 용서를 하는 사람도 지난 일에 대한 상처는 있지만 용서된 일은 잊어야 한다. 사과와 용서는 화해의 본질적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