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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당의 미학

김희경박사 2025. 3. 10. 05:28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이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그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수 많은 남자들에게 집요한 결혼을 요청받았지만 그녀는“옷감을 다 짜면 재혼하겠다”고 하면서 낮에는 옷감을 짜고 밤에는 다시 풀며 밀당으로 시간을 끌었다. 돌아오는 길이 순탄하지 않았던 오디세우스가 거지꼴로 돌아왔을 때에 그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진짜 남편인지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방에 있는 침대를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놓아 달라고 했다. 오디세우스는“우리가 결혼했을 때 살아있는 나무를 베어 내고 그대로 만든 침대이기에 뿌리가 땅에 박혀 있어 옮길 수 없다”고 하자 남편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오디세우스의 치밀한 심리전은 말 그대로 밀당(Push and Pull)이었다. 밀당은 연인 사이의 단순한 사랑의 기술이 아니다. 때로는 생존전략이나,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세력다툼(Tug of war)이 될 수도 있다. 밀당은 인간관계에서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다. 밀당의 긴장감은 연애뿐만 아니라 협상, 정치, 비즈니스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유용하다.

  국어사전은 밀당을 “연인이나 부부, 또는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나 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적 싸움으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밀당은 관계역학, 애착이론, 게임이론 등의 사회적 이론과 관련이 있다. 애착이론을 연구한 존 볼비(John Bowlby)와 메리 에인스워스(Mary Ainsworth)에 따르면 사람들은 애착유형에 따라 다른 밀당 패턴을 보인다. 불안형 애착은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정적 밀당을 시도한다. 회피형 애착은 상대가 가까워지려고 하면 거리를 두면서 밀당을 지속한다고 한다. 에스더 페렐(Esther Perel)은 연애심리학에서 밀당은 긴장과 신비감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연애 초반에는 자신이 가치있고, 품격이 높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밀당의 전략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연구에서 밀당의 적절한 심리적 거리 유지가 관계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사회학 측면에서도 밀당은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딘디아와 캐나리(Dindia & Canary(1993)의 연구에서 심리적 거리조절이 관계지속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심지어 폭스와 앤더에거(Fox & Anderegg(2014)의 연구는 온라인 상에서의 밀당은 실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SNS 상에서 우리는 종종 “읽씹(읽고 씹기), 일부러 늦게 답장하기”같은 밀당을 한다. 밀당은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고, 최적의 행동을 선택하는 사고 과정이다. 이를 경제학에서 게임이론이라고 한다. 우리의 대화에도 심리게임이 작용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성 선택이론(Sexual Selection)에서 밀당은 짝짓기 전략의 하나라고 쓰고 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연구가 있다. 로버트 치알디니(Robert Cialdini(1984)의 희소성의 원칙에 따르면 어렵게 얻을수록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는 심리와 같다. 밀당의 과정에서 거짓과 사기, 왜곡이 상대에게 노출되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건전한 밀당은 관계를 흥미롭고 깊이 있게 만든다. 밀당을 통해 서로 간에 긴장감과 설렘을 갖게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너무 쉽게 얻을 수 없다고 느끼면 더욱 집중하게 된다. 사랑의 감정적 기복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더 강하게 하고 자극할 수 있다. 밀당은 자기 존중감을 지키는 기술이다. 무조건 상대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의 입장을 유지하며 관계를 조절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반면에 밀당은 상대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밀당은 관계의 균형을 유지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물질의 원자는 가까워지면 밀어내는 척력(Repulsion)과 멀어지면 당기는 인력(Gravitation)의 작용으로 가장 좋은 거리인 평형거리를 만든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권력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관계가 불안정하게 된다. 밀당은 이를 조절하는 역할이다. 반면 밀당이 지나치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상대가 관심이 없다고 느끼거나, 적절한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 거리감을 두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신뢰가 깨어질 수 있다. 지나친 밀당은 감정 소모를 일으키고 지쳐서 포기하거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 밀당은 보다 친밀해지고 든든한 관계를 만드는 법칙이다. 밀당을 주고 받음으로 보다 더 나은 결과를 이루어 내야 한다. 때문에 밀당은 서로가 이기는 게임이 되어야 한다. 밀당은 협상의 과정이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조화를 만드는 기술이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밀당이 우리 정치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