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영혼을 일곱 번 경멸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영혼이 좀더 높이 되려고 유연해짐을 보았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절름발이 앞에서 절룩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그가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나의 영혼이 쉬운 쪽을 선택하였을 때입니다. 네 번째는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다른 자들도 역시 잘못을 저지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때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가 나약하기 때문에 참고 견디면서 그 인내를 용기의 덕분으로 돌리는 때입니다. 여섯 번째는 얼굴의 추함을 경멸하면서 그것이 바로 그 자신의 가면임을 모르던 때입니다. 일곱 번째는 그가 찬송을 부르며 그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던 그런 때입니다.”시대의 천재라고 불리는 레바논의 시인이고, 화가이며, 철학자인 자칼릴 지부란(Kahhl Gibran)의 ‘나의 영혼을 경멸할 때’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그는 자신의 내적 갈등의 부조화를 경멸했다. 이런 태도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궁핍하였지만 모든 세속적 탐욕에 저항하고, 권위와 위선을 통렬히 비판할 수 있었다.
성경에서 예수는“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다. 자기부인(Self-denial)은 핼라어로 ‘아르네오마이’인데 이는 부인하다(deny), 무시하다(Ignore, disregard), 조롱하다(Disdain)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케임브릿지 영영사전에서 경멸하다(Despise)는“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나쁘거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강렬한 미움을 느끼다”라고 정의한다. 중세에 디스피트(Despit)는 굴욕, 모욕이나 조롱의 행위, 악의, 경멸, 무례한 경멸의 태도로 쓰였다. 독일어의 페라흐퉁(Verachtung)은 경멸, 모멸, 업신여김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이는 반드시 부정적인 단어로 쓰이지 않았다. 경멸은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한다. 영원을 상징하고, 절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깎아지고 다듬어져야 한다. 다이아몬드는 누구를 질투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깎아내는 경멸을 참는다. 성숙한 사람은 경멸의 눈으로 자기를 본다. 자신의 모나고 거칠며, 고집스러움을 역겹게 보고, 다듬고 깍아내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은 자기 사랑에서 시작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미움과 비판, 성찰이 포함된다. 신은 죽었다, 나는 신이다, 다만 변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외쳤던 니체도“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러면서도 언제나 경명하는 자인 자신을 존중한다”고 했다. 자기경멸이 자기존중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니체는 사랑도, 친구도 없는 불우한 삶을 살다 정신병에 결려 57살에 죽었다. 자기 경멸은 자기 사랑과 존중으로 내면에 가득한 죄의 속성을 매일 죽이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경멸은 부조화에 대한 저항이며 내적 변화에 도전하는 용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바르고,옳고, 아름답고, 바람직한 이상을 꿈꾸지만 삶의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시지프스(Sisyphos)의 바위처럼 기껏 올려 놓으면 다시 굴러 내린다. 밀어올리기를 포기하는 순간 바위는 자신을 덮칠 뿐이다. 인간은 무거운 바위와 같이 버거운 고통이 밀려오면 힘을 쓸 수 없는 자기를 경멸하고 저주한다. 성경의 욥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당대의 의인이고 부자였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뿐아니라 신에게도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사탄의 시험으로 하루 아침에 자녀와 부와 건강과 명성을 잃고 아내마저 떠나버렸다. 누더기로 겨우 몸을 가리고 몸을 긁으며 자기의 출생과 삶을 경멸하고 저주한다. 약하고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모든 선함이 아무 소용없음을 한탄한다. 그럼에도 그는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그는 모든 삶을 회복한다.
자기경멸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무력함, 무식, 악의, 불의함을 깨닫고 자신을 탓할 수 있어야 자기성찰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부끄러운 짓을 미워하지 않으면 결코 바르게 살 수 없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견딜 수 없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정치인들도 있다. 자기를 경멸하는 것이 자가 사랑임을 깨달았다면 그 무거운 시지프스의 바위를 밀어 올렸어야 했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불의한 나를 알고, 유혹에 넘어지는 나를 경멸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도 여전히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악의를 선의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 어리석다. 남을 경멸하는 짓은 악하고, 교만하다. 그럼에도 자기를 경멸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