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여백의 미학

김희경박사 2025. 4. 18. 04:00

“마음의 평온함은 더 높은 삶을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로마의 해방된 노예로서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Epictetus, 55~135)는 말한다. 그는 세상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기를 바라지 말고,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여백은 마음의 평온함이다. 반달은 하늘에 흐르면서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채워짐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삶은 행복하다.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다섯가지로 말했다. 한 마디로 여백이 있는 삶이다.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떨어진 외모, 자신의 생각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남과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되 두 사람에게는 질만 한 체력, 연설을 할 때 청중의 절반 정도가 박수를 치는 정도의 말솜씨”라고 했다. 여백은 의도적으로 남겨둔 공간이다.

  성경에서 바울은“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라고 했다. 가득 채우지 않은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글로벌 IT기업 애플(Apple)의 창업자 스티브잡스(Steve Jobs, 1955~2011)는 “Stay Hungly, Stay Foolish”정신으로 살았다. 그는 언제나 허기와 어리석음에 머물었다. 채워야 할 허기는 창의력을 만들어내고. 무식은 학습을 자극했다. 여백은 상상과 지혜의 공간이었다.‘너의 무식함을 알라’고 스피스트들을 질책했던 소크라테스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여유를 말했다. 여백은 비움(Blank)이고, 공간(Space)이다. 틈새(Gap)이며 차이(Margin)이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예너지 저장소이다. 여백은 단순한 삶의 공백이 아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쉬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유이다. 마치 투우와 같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힘든 싸움을 하는 중에 심리적 안정을 누리고, 재충전을 위힌 휴식처가 있다. 커렌시아(Querencia)이다. 여백은 우리 삶에도 케렌시아가 필요하다.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정심을 회복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여백은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그림을 감상할 때 그림의 구성에 여백이 있으면 시각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감상하는 사람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우리 삶 가운데 여백은 단순하다. 남겨진 시간에 일을 떠나 소일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시간에 좇기지 않고 명상, 산책, 독서 등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즐기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의 여백을 유지해야 부담스러운 의무와 책임에서 자유롭다. 완벽함을 고집하는 집념은 종종 강박의 올무가 되어 사유의 자유를 억제한다. 여백은 질주하는 우리에게 쉬어가는 틈이다. 일본 오사카 마라톤대회는 특별하다. 18km를 지나면서 먹거리가 제공된다. 32.8km에 이르면 뷔페를 즐길 수 있다. 인간의 의지를 식욕으로 유인하는 것이 아니다. 마라톤의 힘든 여정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여백이다. 한편, 여백은 모자람의 미학이다. 고대 중국에는 잔에 술을 채울 때 70%가 넘으면 모두 새어 버리는 술잔인 계영배(戒盈杯)가 있었다.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술잔이다. 조선의 실학자 하백원(河百源, 1781~1845)이 그 제작방법을 도공 우명옥에게 알려주어 계영배를 만들었다. 이 술잔은 후에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林尙沃, 1779~1855)에게 전해졌다. 그는 늘 곁에 둔 계영배를 보면서 넘쳐나는 과욕을 다스렸다고 한다.  

  2018년에 우리는“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대통령후보의 깔끔한 구호에 환호했다. 이 후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 Work and Life Balance)은 삶의 큰 흐름이 되었다. 근로시간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우리는 행복한 삶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삶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돈인 근로자들은 오히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과도한 인건비로 고용을 줄여야 했다. 저녁있는 삶이 아니라 투잡(Two Job)을 뛰어야 먹고 살게 되었다. 학생들은 알바를 구하기도 힘들어 했다. 일과 삶이 분리 될 수 없다. 일이 삶이고 삶이 일이다. 일과 삶을 분리하는 순간 일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 된다. 일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일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자아를 실현한다. 여백은 일 가운데 만들어가는 삶의 틈새 커렌시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