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두려움은 분리될 수 없다. 두려움이 없는 희망이 없으며, 희망이 없는 두려움도 없다. 장차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행을 미리 염려하는 것 보다는, 바로 눈 앞의 불행을 참고 견디는 일에 마음을 쓰는 것이 좋은 방책이다.”귀에 거슬리고 역설적인 사상이나 진실을 예리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글인 잠언(maxime)의 대표적 작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 1613~1680)의 말이다. 두려움은 대체로 부정적 감정이지만 인간의 태생적인 생존본능이다. 갓난아이가 엄마와 생명이 분리되는 순간 처음으로 부딪힌 낯선 세상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의 울음은 부모에겐 기쁨이지만 아이에게는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반응하는 소스라침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바로 위험에 노출된다. 사는 동안 수많은 위험과 위협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우고 극복한다.
두렵고 무서움을 공포(Fear)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 두려움은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며, 무서움은 위험이나 위협에 처해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두려움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 인해 극한 긴장상태로 오는 불안감이고, 무서움은 보이는 실체로 인해 위험이나 위협을 느끼는 긴장과 불안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두려움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리고, 돈을 벌고, 욕구를 충족시킨다. “심리학에 속지마라. 내 안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심리학의 진실”을 쓴 독일의 심리학자 스티브 아얀(Steve Ayan)은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한 불안과 성공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교묘하게 이용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지난 100년간 심리전문가들이 IQ와 EQ테스트, MBTI검사, 모차르트 효과 등의 심리상품들로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고 배신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활발한 아이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종종 가벼운 문제를 정신질환으로 키우기도 한다. 기업들도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감과 공포감을 자극하여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데 이를 공포마케팅(Fear Marketing)이라고 한다. 보험이나 건강기능식품 광고에서 볼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한 심리를 도구로 하는 공포정치나 가스라이팅도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은 반드시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두려움은 예술과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고딕건축은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어두운 내부 공간을 통해 신에 대한 경외를 나타냈다. 두려움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내면에 깊히 숨겨진 불안과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카르시스를 제공함으로 심리적 해방감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아트와 가상현실(VR)기술을 통해 직접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한다. 위험에 도전하여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얻기 위한 놀이기구, 번지점프, 짚나인, 지옥체험 등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도 공포를 소재로 작품도 있다. 낙랑특집처럼 오싹한 느낌으로 더위를 잊기도 한다. 본래 종교도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원시 인간들은 불확실성과 우연한 불행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더위와 추위, 가뭄, 홍수, 우박, 폭풍우, 질병 등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현상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우연한 일에 대한 경험들이 누적되면서 그 형태의 일관성을 깨닫게 된다.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을 통해 초월적인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두려움 곧 신에 대한 경외(Fear)를 갖게 되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그케르고의 책 “두려움과 떨림(공포와 전율)”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야웨의 명령에 순응하여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아들을 결박하고 제물로 드릴 준비를 하는 아버지의 극심한 두려움과 떨림을 묘사한다.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이 두려움과 떨림의 극한 긴장을 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서움을 무릎쓰고 위험한 체험에 선뜻나서는 것도 안전장치와 운전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두려움을 극복한 다음에 느낄 뿌듯함, 성취감, 쾌락감에 대한 희망이 무서움에 뛰어들게 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나에게 두려운 것이 두 가지 있으니, 저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양심의 소리”라고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에밀 샤르티에(Emile Auguste Chartier.1868~1951)도“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 인간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다”고 했다. 요즘 우리의 이성은 차갑게 얼어가고 감정은 뜨겁게 끓어오르기만 하는 것 같다. 공감을 상실하고 감정은 과잉적으로 반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과 오해, 누군가를 악인으로 치부해버리거나 판단하는 일들은 이성과 감정의 혼돈과 오용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악하거나 병일 수 있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두려움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은 철이들지 않으면 두려움을 못느낀다는 의미이다. 두려운 것을 아는 사람은 철이 든 사람이다. 단 올바른 동기와 정직성은 두려움과 불안을 이긴다.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실행할 때 그 동기가 올바른 일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